영화 '담보' 결말부분에서 형제복지원을 떠올리는 분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실종됐던 '두석(성동일)'을 발견한 곳이 형제복지원과 비슷하기 때문이었는데요. 형제복지원은 어떤 곳이었는지 자세하게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 형제복지원이란? ]
-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하계올림픽을 앞두고, 정부가 대대적인 부랑인 단속에 나섬
- 이것을 배경으로, 1975년 설립된 형제복지원은 국내 최대 규모의 부랑인 일시 보호소임
- 즉, 일정한 주거지나 직업 없이 떠도는 사람들을 위한 복지 시설이었음
- 그러나 형제복지원 직원들은 남녀 가리지 않고, 무고한 시민들을 강제로 납치
- 부랑인을 포함하여 약 3천명을 수용했는데, 이중 약 70%가 억울한 케이스였다고 함
- 형제복지원 위치는 부산시 북구 주례동(현재 부산 사상구 백양대로 372) 일대였음
[ 일반인 강제 수용 이유 ]
- 당시 형제복지원은 부랑인 선도를 목적으로 해마다 20억원씩 국고의 지원을 받았음
- 수용하는 인원이 많을수록 정부지원금을 많이 받을 수 있었음
- 이에 형제복지원은 무차별적으로 일반인까지 납치하여 감금하게 된 것
[ 형제복지원 체계 ]
- 형제복지원에는 계급이 존재하여 수직적으로 통제함 (원장, 중대장, 소대장, 조장, 조원)
- 수용자들은 기상 시, 국기에 대한 경례와 제식훈련을 했음
- 형제복지원 원장이 직업군인 출신이었기에 군대식 구조로 운영되었음
[ 형제복지원 인권유린 내용 ]
- 형제복지원은 수용자들에게 대가 없는 강제노역, 폭행과 감금, 성폭행, 살인 등을 일삼음
- 대부분의 수용자들은 정상적인 식사를 공급받지 못해 식중독 또는 영양실조에 걸렸음
- 수용자 말에 따르면 상한 음식, 석유로 볶은 반찬 등을 제공했다고 함
- 이에 배가 너무 고팠던 수용자들은 살아있는 새끼 쥐를 잡아먹기도 했음
- 또한 수용소에 있던 여성들은 성폭행을 당한 뒤 보상으로 과자를 받았음
- 여성들은 보상으로 받은 과자를 같이 지내는 아동 수용자와 함께 나눠 먹었다고 함
- 지속되는 고문과 고된 작업으로 사망한 수용자들이 많은데, 주로 암매장을 한 것으로 밝혀짐
- 시신 중 일부는 300~500만원에 의과대학 해부학 실습용으로 팔려나감
[ 형제복지원에서 탈출하지 못한 이유 ]
- 당시 부산시와 경찰은 형제복지원과 유착관계였음
- 탈출 후 경찰의 도움을 받기 위해 신고를 하면 다시 형제 복지원으로 데려다줬음
- 그렇기 때문에 탈출을 시도해서 성공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매우 극소수였다고 함
[ 형제복지원 원장 근황 - 박인근 ]
- 1987년 3월 22일, 직원의 구타로 원생 1명이 숨지고 원생 35명이 탈출하게됨
- 이로써 형제복지원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됨
- 당시 수사를 맡았던 담당 검사는 원장에게 징역 15년형과 6억원을 구형
- 그러나 최종적으로 1987년 3월 15일, 벌금 없이 징역 2년 6개월형이 선고됨
- 이후에도 형량은 더 줄어들어 박인근은 겨우 2년이 지난 1989년 7월 20일 출소함
- 전두환은 박인근 구속 소식을 듣고 그에 대해 '박 원장은 훌륭한 사람이오. 박원장 같은 사람 덕분에 거리에 거지도 없고, 좋지 않소.'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짐
-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은 석방 후 위탁을 맡겼던 형제복지원 대표이사 자리를 되찾음
- 그리고 형제복지지원재단으로 상호를 변경 후 부지를 매각하여 막대한 재산을 축적
- 매각한 부지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게 되었는데, 공사 중 약 40~50여구 유골이 나옴
- 이 유골들은 죄다 무연고 처리 후 납골시설들에 안치시킴
- '그것이 알고싶다' 방송에 따르면 박인근 가족은 형제복지재단의 이름으로 사회복지법인을 설립해 운영 중
- 또한 형제복지원 원장은 스포츠센터, 온천과 같은 수익 사업도 하고 있다고 함
[ 형제복지원 오해와 진실 ]
▶ 부산에서만 형제복지원이 운영되었는가 ?
- 형제복지원이 부산에서만 정부의 잘못된 훈령이 적용되어 운영된 것이 아님
- 전국적으로 약 36개가 운영되었다고 함
- 서울 소년의 집, 대구 희망원, 갱생보호소 등이 있으나 형제복지원이 지독했음
- 당시 박인근은 36개 시설을 다니며, 운영에 대한 강의까지 했다고 함
▶ 형제복지원 사망자 수
- 형제복지원에서 사망자로 알려진 숫자는 513명이 아니라고 함
- 영락공원에 안치된 무연고자 38명을 포함하면 확인된 사망자는 551명
- 미확인 사망자까지 더하면 수천 명이 될 것
[ 형제복지원 피해자 인터뷰 - 생존자 이향직 ]
▶ 형제복지원에 들어가게 된 때 ?
- 정확한 날짜는 모르지만, 14살 때 들어가 17살에 나옴 (1984년경)
- 이향직씨의 아버지가 부산 부전역 역전 파출소에 이향직씨를 잠시 맡김
- 그사이 경찰이 다가와 학교도 보내주고 옷도 입혀주고 먹을 것도 준다고 하며 형제복지원에 가보자고 함
- 나중에 알았지만 아버지가 파출소에 돌아왔을 때 경찰은 애가 도망갔다고 말했다고 함
▶ 당시 집안 형편은 어땠는가?
- 의상실을 셋이나 운영하는 부유한 집안이었음
- 당시에 집에 TV가 두 대나 있었다고 함
▶ 형제복지원 안에서 일어나는 성폭행
- 성폭행이나 성추행은 관리자가 아닌 수용자끼리 주로 일어났음
▶ 형제복지원 어린이 폭행
- 크리스마스, 추석, 설날만 빼고 매일 때렸음
- 안 맞으면 아직 잘 시간이 아니라고 느낄 정도였다고 함
- 하루는 한 아이가 울기 시작하자 조장이 타일렀는데 계속 울자 구타가 시작됐음
- 그래도 계속 울고 있으니, 다른 조장들이 다가와 마구잡이로 구타를 함
- 아이는 입에 거품을 물었고, 결국 움직이지 않았음
- 이후 폭행당한 아이를 볼 수 없었다고 함
▶ 형제복지원 안에서 폭행을 일삼은 조장이나 소대장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 어린이 소대 감시는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 사람들이 감시했음
- 조장부터 중대장까지 모두 수용자였음
- 수용자가 아니었던 사람은 원장, 원장가족, 목사, 전도사, 영유아 관련 여선생님이 전부임
▶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
- 폭행보다 얼차려가 고달팠음
- 특히 ‘밥 먹고 선착순’을 하면 밥을 제대로 먹지도 못했음
- 2층 침대 위에 발을 걸고 물구나무서듯이 버티기도 함
- 형제복지원은 외부 음식 반입이 안됐음
- 봉제공장을 운영하면서 하루 할당량을 채우면 라면, 초코파이를 받을 수 있었음
- 이후 외부 음식 반입 금지가 없어짐
▶ 형제복지원에서 나온 뒤 피해 사실을 주변에 알렸나 ?
- 당시에 형제복지원이 잘못된 곳인지 몰랐음
- 여준민 사무국장의 설명을 듣고, 형제복지원의 부당성을 듣고 이해하게 됨
과거에는 영화에서만 보던 이런일이 실제로 일어났었다니.. 알게 모르게 아직도 이런 일이 사각지대에서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정말 무섭습니다. 얼마전 그것이 알고싶다 선감도 수용소도 비슷한 내용이었는데... 앞으로는 이런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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